책book책📖

팀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 1,2

🎁아토 2021. 10. 12. 20:27
728x90
반응형
SMALL

이 야기는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 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두 아들의 설교를 들으면 탕자이야기에 집중해 온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탕자에만 집중된것이 아닌 두 아들에 모두 빗대어 표현하는 책이다.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눅 15:13, 11-32

1. 나는 왜 예수앞에 나오는가?
 대체로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읽을 때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 "탕자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두형제가 각기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는 다른 길을 대변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길도 양쪽이 서로 다른 내용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앞서 역사적 배경부터 눈여겨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예부터 교회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 본문을 가르치면 아버지가 회개하는 둘째 아들을 거저 받아준다는데 거의 전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 비유를 처음 들었을 때는 어떻게 살아왔든 하나님이 늘 사랑으로 받아주신다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면 이 비유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것 뿐 안된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로 불리었다.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과 아버지가 나오는 비유를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을 무신론자라 부르는게 지극히 당연했음을 알수 있다.

2.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 처럼 질주한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가장 걸맞는 명칭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이다.
 1막은 '잃어버린 둘째아들' 2막은 '잃어버린 맏아들' 이다.
둘째는 아버지에게 가서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옷 분길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지금 달라고 한 것은 지극히 무험한 행위임을 짐작한다. 한마디로 둘째는 아버지를 원한것이 아닌 아버지의 재산을 원한 것이다.
이러한 무례한 부탁에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사랑해 그대로 해준다.
아버지는 사랑을 거부 당한 고통뿐 아니라 처참한 명예 훼손까지 참고 견딘다. 대게 우리는 사랑을 거부당하면 화가 나서 복수한다.
거부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최대한 거둬들여 자신의 상처를 줄이고 아들을 사랑하여 괴로움을 견딘다.
둘째 아들은 "먼나라(13절)"로 가서 고삐풀린 생활방식으로 전 재산을 날린다. 자기 신세가 돼지와 같아지자 "스스로 돌이켜(17절)" 혼잣말로 계획을 짠다.
아버지에게 돌아가 자신이 죄를 지어 아들의 자격을 잃었음을 자인하고 염치 없지만 어비지에게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절)"라고 부탁한다.
둘째 아들은 자기 집안은 물론 지역사회 전체의 수치가 되었다. 하염없이 둘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를 보고 달려가 반긴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하려는 말을 멈추고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힌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환영파티를 연다.
이는 고의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살해앴어도 상관없고 자신을 지독히 학대했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동생은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17절)" 줄로 알았으나 은혜도 풍족함을 깨달았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지 못할 악은 없고 아버지의 은혜에 맞먹을 만한 죄는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다.
대가없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다.
2막에서 형은 동생이 들어와 아버지가 신분을 회복해 주었다는 말에 격노하는 이야기이다.
맏아들이 격노한 이유는 둘째 아들이 모든 일에 뒤따를 손해 때문에 속이 뒤집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둘째아들을 다시 상속자로 삼아주시고 3분에 1에 대한 권리를 주었기에 격노한것이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긴적이 없기에 결정내릴 권리는 없다고 홧김에 무례하게 대한다.
이때 맏아들은 예를 갖추어야했다. 그런데 형은 그러지 아니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되게 했다만 나는 너도 잔치에 동참했으면 한다. 나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널 버릴 마음도 없다.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라"고 말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아버지의 인자함에 호소가 심금을 울린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화해했는지는 알 수없이 끝이난다.
예수님은 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결과를 들려주시지 않았나? 이야기의 진정한 청중이 형들, 곧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것을 재정의하신다. 죄 잃어버린 바 된 상태, 구원의 바른 의미를 알려주신다.

https://ye7383.tistory.com/entry/%ED%8C%80%EC%BC%88%EB%9F%AC%EC%9D%98-%ED%83%95%EB%B6%80-%ED%95%98%EB%82%98%EB%8B%98-%EC%98%88%EC%88%98-%EB%B3%B5%EC%9D%8C%EC%9D%98-%EC%8B%AC%EC%9E%A5%EB%B6%80%EB%A5%BC-%EC%B0%BE%EC%95%84%EC%84%9C-3

 

팀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 3

눅 15:13, 11-32 3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비유에 아노는 형제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두가지 기본적인 길을 보여주신다.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ye7383.tistory.com

 

728x90
반응형
LIST